책을 읽기 전에

나는 개인적으로 자기계발 서적을 좋아하지 않는다. 혹여나 읽게 된다면 굉장히 방어적이고, 비판적인 태도로 읽는다. 학부 2학년 때 읽었던 ‘긍정의 배신’이라는 책이 이러한 태도를 갖게한 주범이었다.

‘긍정의 배신’은 긍정 이데올로기에 취해있는 우리 사회에서 맹목적인 긍정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쓸데 없는지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는 책이다. 그 내용이 굉장히 신선했고, 비판의 강도도 높았다. 분명 초반부는 흥미로운 책이었다.

그러나 동일한 패턴의 비판만 계속될 뿐, 해결방법 등을 제시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자신이 만났던 “긍정에 취해있는 한심한 인간들”의 부류를 나누고, 바보취급 하는 것이 전부였다. 책의 머리말 부분에 “나는 개인적인 실망이나 신랄한 기분 탓에 이 책을 쓴 것이 아니다.” 라고 적혀있었는데, 그래서 쓴 책 맞는 것 같았다. 작가 본인도 찔리는 바가 있으니 저런 말을 써둔게 아니었을까?

‘긍정의 배신’ 책 이후로 자기계발 서적에 대한 기대가 너무 낮아져서, 연간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책이어도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다. (원체 독서량이 적기도 했지만…) 그러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표지가 마음에 들어 뽑아든 책이 박준호(제이) 님이 추천해주신 ‘소프트웨어 장인’ 이었다. (책 추천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 자기계발 서적으로 분류되어 있는 것이 불안했으나, 준호님의 추천과 포비의 추천 목록에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천천히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괜찮은 책이네!

1990년대에는 다른 사람이 알아볼 수 없는 난해한 코드를 짤 수 있는 사람이 실력있는 개발자로 통했다. “와우! 그는 똑똑한 개발자가 틀림없어. 그 사람 코드는 무엇을 하는 코드인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거든.”

저자 서문에서 30년전 이야기를 해줄 때, 문뜩 새내기 시절 내 모습이 떠올랐다.

학부과제를 뚝딱뚝딱 잘 해결하던 형이 있었는데, 실력뿐만 아니라 열정도 대단해서 항상 과제를 완성하고서도 몇 번이나 다른 방식으로 과제를 완성했다. 그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버전을 자신이 제출하고 나머지 버전은 주변 동기들에게 공개했는데, 당시 나 또한 그 형이 공개한 flag와 다중 if 키워드로 범벅되어 있는 코드를 읽으면서 “와우! 이 형 코딩 졸라 잘한다!” 라고 감탄했던 기억이 떠올라 풋풋한 웃음이 나왔다.

나는 아직 미혼에 혼자 살고 있었고 일이 좋았다. 무엇보다도 내가 무엇을 해낼 수 있는지 보이고 싶었고, 팀원 모두가 프로젝트를 성공해내길 바랐다. 우리 모두는 영웅이 되고 싶었다. 프로젝트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있었고 경험 많은 팀 동료들과 어울리는 것도 좋았다. 특히 고품질의 좋은 코드를 작성하는 일이 즐거웠다. 팀 동료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모두가 지치고 힘들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즐기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을 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는 프로페셔널하지 못했다. 우리가 왜 그 일을 하는지 스스로 묻지 않았다. 고객이 실제로 무엇을 원하는지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다른 대안을 제사하지도 않았다. 고객을 만날 수도 없기는 했지만, 요구사항에 대해서 질문을 하지도, 실행할 수 없다는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냥 주어진 환경을 있는 그대로 두고, 무작정 일을 밀어 붙였다. 그 때는 그것이 프로페셔널이라고 생각했다.

근로장학생 활동기간 동안 그저 열정으로만 일을 해내던 내 모습이 그려졌다. 말도 안되는 요구사항에 “힘들 것 같아요…” 라고 미뤄내면서도 속으론 요구사항을 구현함으로서 내 능력을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이 가득했고, 결국 개인시간을 투자하면서까지 요구사항을 구현하곤 했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인정과 명예를 원했다. 우리는 프로젝트를 구한 영웅으로, 불가능한 일을 해낸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그 모든 노력은 헛고생으로 끝났다.

우리는 명예를 얻지도 못했고, 그저 값싸게 노예처럼 일하는 개발자들에 불과했다.

우리가 노예처럼 일할 때 영업 비즈니스 부서 사람들은 항상 정시에 퇴근해 가족과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영업팀과 비즈니스 팀을 위해 헌신한다고 생각했지만, 당사자들은 실상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우리는 그저 모든 부담을 떠안고 힘들게 일만 하는 공장 노동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그런 것들을 몰랐다. 오히려 그 부담이 좋았다. 우리 팀에는 실력있는 동료들이 가득했고 그들과 함께 일할 수 있다는 것이 기뻤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책보다 상황이 나았다. 당시 매니저님께서 나의 노력을 알아봐주셨고, 그에 응당하는 금전적 보상을 챙길 수 있게 도와주셨다. 아마 매니저님이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나도 책과 같은 허무맹랑함을 겪지 않았을까.

애자일 방법론을 간단하게 설명하는 파트에서는 문뜩 3년전 전공과목 교수님과 1:1 상담을 진행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학생은 코드를 짤 때 어떤 사이클을 가지고 짜는가?”

“어.. 우선 키보드에 손을 얹고 무작정 짭니다.”

“당장 학부에서 만나는 간단한 프로젝트들은 그게 먹히겠지만, 취업을 하거나 다른 큰 규모의 프로젝트를 만날 때부턴 철저하게 기획부터 거치고 모든 검증을 마친 다음, 가장 마지막에 코드를 짜야 해.”

“음…“

“학생은 코드를 직접 타이핑하는 개발자가 얼마나 오래 갈거라 생각하지? 그런 사람들은 수명이 짧아. 젊은 사람들이 휙휙 돌아가는 머리로 치고 올라오는데, 조금이라도 빨리 아키텍쳐 같은 관리직으로 올라가야지. 당장 오늘부터라도 습관을 고쳐야하겠는데?”

“아하..” (끄덕끄덕)


지금 생각해보면, 현재 가장 핫한 애자일 방법론과 소프트웨어 개발자의 역할에 대해 정반대 되는 조언을 해주셨다. 그도 그럴 것이, 교수님 세대에는 정말 그랬으니까. 게다가 소프트웨어 보다 하드웨어(반도체 공정) 쪽으로 더 깊은 조예를 가지고 계신 분이기 때문에, 그쪽 분야 특성상 저런 말씀을 하시는게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조언을 얻을 때, 무조건 받아들일게 아니라 상대방이 그런 조언을 하게 된 배경과 현재 내가 처한 상황에 그 조언이 잘 어울리는지 생각하면서 받아들여야 한다.’

계속해서 과거 내 경험을 비춰보기도 하고, 이런저런 생각들을 정리하면서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어째 좀…

책 전체 분량의 3/4 를 넘어가자, 책이 점점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문제되는 상황과 그것을 해결할 좋은 기법들, 그리고 개발자가 가져야할 장인 정신에 대해 간드러지게 이야기하던 책이 어느샌가 장인 정신이 없는 사람들을 바보 취급하고, 바보들의 부류를 나누고, 바보 중 하나와 말싸움에서 이긴 걸 사이다 썰처럼 여러 페이지에 걸쳐 보여주는 등…

피해망상
이 부류의 사람들은 다루기 매우 어려운 부류 중 하나다. ‘피해망상’류는 당신이 아닌 회사를 상대로 대항한다.

나의 경우에도 ‘피해망상’에 빠진 사람들을 성공적으로 구해낸 기억이 별로 없다.

피해망상을 가진 것 같다고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면, 왜 피해망상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 아닐까? 마음에 안드는 사람들을 입맛대로 분류하고 그들을 상대하는 매뉴얼을 제시하는게 올바른 일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결국 자기계발 책은 작가의 생각에 반대되는 사람들을 바보취급하고 우월감을 느끼는 책인건가?’ 라는 생각과 함께, 자기계발 서적에 대한 실망이 되풀이 되었다.




배울게 많은 책이야

좋은 의미와 나쁜 의미를 모두 포함해서, 배울게 많은 책이다.

좋은 의미로서 배울게 많은 점은 매니페스토, ‘아니오’라고 말하는 방법 배우기, 배움문화 만들기 등과 같이 당장 소프트웨어 개발자가 달라져야할 태도나 가지면 좋을 자세, 습관 등을 상세하게 제시해주면서 정말 자기계발이 될만한 것들이 많았다.

매니페스토
소프트웨어 장인을 열망하는 우리는, 스스로의 기술을 연마하고, 다른 사람들이 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도움으로써 프로페셔널 소프트웨어 개발의 수준을 높인다. 이러한 일을 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가치들을 추구한다.

동작하는 소프트웨어 뿐만 아니라, 정교하고 솜씨 있게 만들어진 작품을,
변화에 대응하는 것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가치를 더하는 것을,
개별적으로 협력하는 것뿐만 아니라, 프로페셔널 커뮤니티를 조성하는 것을,
고객과 협업하는 것뿐만 아니라, 생산적인 동반자 관계를,

이 왼쪽의 항목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오른쪽 항목들이 꼭 필요함을 의미한다.

나쁜 의미로서 배울게 많은 점은 자기 기준으로 답답한 사람들의 부류를 나누고 이들을 구체적으로 바보취급 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파트를 읽으면서, ‘절대 저렇게 살면 안되겠다.’ 라고 다짐하게 되는 것들이었다.


장인으로서의 자부심

다른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 소프트웨어 개발에 대한 자부심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느끼게 해주는 책이었다. 집보다 회사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세상이다. 내가 내 일을 사랑하고 즐기지 않는다면 행복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교수님 세대까지만 해도 개발자를 공장라인 취급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개발자 자신들이 먼저 자부심을 갖지 않는다면 다시 공장라인 취급 당하는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으로, 책에서 개발자들을 케어하는 방법을 잘 모르는 관리자를 대상으로도 관리자가 가져야할 마인드나 여러가지 해야할 일들에 대해 꽤 많은 분량에 걸쳐 설명을 하고 있으나, ‘과연 그런 관리자들이 이 책을 읽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책을 읽을 정도의 관리자라면 이미 개발자들에게 진심을 다해 잘해주고 있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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